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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타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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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가타 지진은 1964년 6월 16일 일본 혼슈 동해안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지진과 함께 쓰나미, 액상화 현상으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다. 이 지진으로 인해 니가타현, 야마가타현, 아키타현 등 9개 현에서 피해가 발생했으며, 26명이 사망하고 477명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액상화 현상으로 인해 가옥 붕괴, 쇼와대교 붕괴, 쇼와 쉘 석유 화재 등 큰 피해가 발생했으며, 일본 사회는 안전 불감증과 부실 공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이 지진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지진 보험 제도가 도입되었고, 도시 계획 및 건축 기준이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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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타 지진
지도 정보
니가타에서 발생한 액상화 현상. 아파트가 액상화로 인해 옆으로 쓰러졌다.
토양 액상화로 인해 니가타의 아파트가 기울어진 모습
지진 정보
이름1964년 니가타 지진
현지 시각1964년 6월 16일 13시 01분 43초
진앙니가타현 무라카미 북서쪽 24km
규모7.6 w
깊이34km
유형경사 이동
쓰나미발생
개요
일본어 명칭(니가타 지신)
발생 위치니가타현 하에쓰 앞바다, 아와섬 남쪽 앞바다 40km
피해
사망/실종36명
부상385명
영향 국가일본, 니가타현

2. 지질학적 환경

혼슈 서북쪽 동해 해안 지역은 후기 올리고세부터 중기 마이오세까지 후열 확장으로 생성된 해양 지각 지역으로,[2] 일본 해구를 따라 유라시아판 아래로 태평양판섭입하면서 발생한 배호분지열개 과정과 관련이 있다. 이 열개는 마이오세 초기에 시작되어 마이오세 중기에 끝났으며, 이 과정에서 남북 방향의 인장 단층들과 관련된 퇴적 분지들이 형성되었다.[2]

플라이오세 말기에는 지각 운동 방향이 압축하는 형태로 바뀌었는데, 이는 이즈-보닌-마리아나호와 혼슈의 충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63] 이 변화로 인해 이전에 형성되었던 단층들이 역으로 활성화(재활성)되면서 분지 반전 현상이 일어나 배사 구조가 만들어졌다.[64][2]

현대 일본 열도는 태평양판, 필리핀해판, 오호츠크판, 아무르판 사이의 수렴 경계 위에 놓여 있다. 동해와 접한 혼슈 서해안은 아무르판과 오호츠크판 사이의 남북 방향 수렴 경계에 해당하며, 이를 동해 동연 변동대라고 부른다.[65] 이 변동대는 동쪽으로 기울어진 충상단층들로 구성된 초기 섭입대의 형태를 띠는 것으로 여겨진다.[66]

이러한 복잡한 지질학적 환경 속에서 과거의 단층들이 재활성되면서 지진이 발생하는데, 1964년 니가타 지진 역시 이러한 재활성된 단층 중 하나에서 역단층 운동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4]

2. 1. 동해 동연 변동대

혼슈 서북쪽 동해 해안 지역은 일본 해구를 따라 유라시아판 아래로 태평양판섭입하면서 생긴 배호분지열개로 형성된 동해의 동남쪽 가장자리에 해당한다. 이 열개 과정은 마이오세 초기에 시작되어 마이오세 중기에 끝났다. 후기 올리고세부터 중기 마이오세까지의 후열 확장으로 생성된 해양 지각 지역이며, 이 확장은 남북 방향의 인장 단층과 관련 퇴적 분지를 형성했다.[2]

플라이오세 말기에는 지각 운동이 압축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이즈-보닌-마리아나호와 혼슈의 충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63] 이 압축으로 인해 과거 열개 과정에서 형성된 단층들이 역으로 활성화(재활성)되면서 단층으로 형성된 분지가 반전되는 현상이 일어났고, 배사 구조를 형성했다.[64][2]

현대 일본은 태평양판, 필리핀해판, 오호츠크판, 아무르판 사이의 수렴 경계 위에 위치한다. 섬의 동쪽과 동남쪽 해안을 따라 태평양판과 필리핀해판이 각각 일본 해구난카이 해곡에서 섭입한다. 동해와 접한 혼슈 서해안은 아무르판오호츠크판 사이의 남북 방향 수렴 경계에 해당하며, 이곳을 동해 동연 변동대(일본해 동연 변동대)라고 부른다.[65][20] 특히 이 변동대 경계는 동쪽으로 기울어진 충상단층들로 구성된 초기 섭입대로 여겨진다.[66]

동해 동연 변동대에서는 과거 열개와 이어진 반전 현상으로 인해 규모 M6.8~7.9의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여러 단층이 형성되었다. 이 단층들은 많은 경우 지진과 함께 큰 쓰나미도 일으킨다.[65]

동해 동연 변동대의 주요 지진[65][67]
연도지진명비고
1741년간포 쓰나미발생 여부 논쟁 중
1833년쇼나이 해역 지진
1940년샤코탄반도 해역 지진
1964년니가타 지진
1983년동해 중부 지진
1993년홋카이도 남서쪽 해역 지진



1964년 니가타 지진 역시 사할린에서 니가타 앞바다로 이어지는 이 동해 동연 변동대에서 발생한 지진 중 하나로,[20] 재활성된 단층 중 하나에서 역단층 운동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4] 이 지진으로 진원 근처의 아와시마 섬이 약 1m 융기했다.[54][21] 아와시마 해안에는 과거의 지진 활동 흔적인 여러 개의 단구가 형성되어 있으며, 활단층의 활동 간격은 단구 높이 분석으로는 약 2000년, 해저 활단층 해석으로는 약 3000년 간격이라는 설이 있다.[20] 니가타 지진 발생 전, 진앙을 중심으로 반경 약 50km 범위에서는 16년 동안 지진 활동이 저조한 '정온화' 현상이 관찰되었으며, 지진 발생 약 2년 반 전부터 다소 활발한 활동 후 본진이 발생했다.[22]

2. 2. 단층 활동과 지진 발생 메커니즘

혼슈 서북쪽 동해 해안 지역은 일본 해구를 따라 유라시아판 아래로 태평양판섭입하면서 형성된 배호분지열개하여 만들어진 동해의 동남쪽 가장자리에 해당한다. 이 과정은 마이오세 초기에 시작되어 중기에 끝났으며, 플라이오세 말기에는 지각이 압축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이는 이즈-보닌-마리아나호와 혼슈의 충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63] 이로 인해 과거 열개 과정에서 만들어진 단층들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역단층 활동을 시작하며 분지 반전 현상이 일어났다.[64] 오늘날 일본 열도는 태평양판, 필리핀해판, 오호츠크판, 아무르판 사이의 수렴 경계 위에 놓여 있다. 동해와 접한 혼슈 서해안은 아무르판과 오호츠크판 사이의 남북 방향 수렴 경계에 해당하며, 이를 동해 동연 변동대라고 부른다.[65] 이 변동대는 동쪽으로 기울어진 충상단층들로 이루어진 초기 섭입대의 형태를 띠는 것으로 보인다.[66]

동해 동연 변동대에서는 과거 열개와 이어진 분지 반전의 영향으로 혼슈 서해안을 따라 여러 단층이 형성되었다. 이 단층들은 규모 M6.8에서 7.9에 이르는 큰 지진을 일으킬 수 있으며, 종종 강력한 쓰나미를 동반한다.[65] 이 변동대에서 발생한 주요 지진으로는 1741년, 1833년, 1940년, 1964년 니가타 지진, 1983년, 1993년 지진 등이 있다. 다만, 1741년 지진의 경우 그 발생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있다.[67]

1964년 니가타 지진은 모멘트 규모 7.6을 기록했으나, 진원 깊이가 34km로 비교적 깊었기 때문에 혼슈 해안에서 관측된 진도는 단단한 지반 기준으로 수정 메르칼리 진도 계급 VIII(심각) 이하로 측정되었다.[4] 단층 메커니즘 분석 결과, 북북동-남남서(N20°E)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서쪽으로 기울어진 역단층의 활동으로 밝혀졌다.[8] 이 지진의 지진 파열 영역은 1833년 쇼나이 지진과 유사하며 일부 겹치는 것으로 나타났다.[9]

니가타 지진은 사할린에서 니가타 앞바다까지 이어지는 동해 동연 변동대에서 발생한 지진 중 하나이다. 여진은 진앙을 중심으로 북북동-남남서 방향으로 약 80km 범위에 걸쳐 분포했지만, 당시 주변 육상 지진계 설치 밀도가 낮고 해저 지진계가 없어 여진의 정확한 진원 위치나 단층의 경사 방향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20] 이 지진으로 진원 근처의 아와시마 섬은 약 1m가량 융기했으며,[54][21] 일본해 해안 지역은 5cm~20cm 정도 침강했다. 아와시마 해안에는 여러 개의 단구가 형성되어 있어 과거의 지진 활동 흔적을 보여준다. 이 단구의 높이를 기준으로 추정한 과거 지진 활동 간격은 약 2000년이라는 설과, 해저 활단층 해석을 통해 약 3000년 간격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있다.[20]

지진 발생 전에는 선행하는 '정온화' 현상이 관측되었다. 진앙 주변 반경 약 50km 범위에서는 본진 발생 전 16년 동안 지진 활동이 매우 저조했으며, 이후 지진 발생 약 2년 반 전부터 활동이 다소 활발해지다가 본진이 발생한 것으로 분석되었다.[22]

3. 지진 관측 및 진도

당시 일본 기상청의 지진 관측은 기상 관서 중심으로 이루어져 실제 진동은 공식 기록보다 강했을 수 있다. 특히 진원지 부근은 진도 6(현재의 6약~6강)으로 추정되며,[12] 니가타 방송의 사사(社史)인 《니가타 방송 40년의 발자취》에도 "니가타 시에서 진도 6"이라는 기록이 있다.[12]

3. 1.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기준 진도 4 이상을 관측한 지점은 다음과 같다.[12]

진도도도부현관측 지점
5미야기현나루코 통보소, 센다이미야기노구 고린
야마가타현아라사와 통보소, 사카타시 카메가사키, 신조시 히가시야치다마치
후쿠시마현타다미 통보소
니가타현나가오카 통보소, 니가타주오구 코우사이, 사도시 아이카와 산초메
4이와테현모리오카시 산노초, 미즈사와 관측소
미야기현츠키타테 통보소, 이시노마키시 이즈미초
아키타현아키타시 산노
야마가타현야마가타시 미도리초, 오바나자와 통보소, 요네자와 통보소
후쿠시마현후쿠시마시 마츠키초, 고리야마 통보소, 시라카와시 카쿠우치, 이와키시오나하마, 아이즈와카마츠시 자이모쿠마치
이바라키현이시오카시 카키오카
토치기현오타와라 통보소
군마현스다카이 통보소, 마에바시시 쇼와초
니가타현조에츠시 오테마치
이시카와현와지마시 호우시마치
나가노현나가노시 하코시미즈



당시에는 기상청에 의한 지진 관측이 기상 관서에서만 이루어졌으며, 진원지 부근 지역에서는 진도 6(현재의 진도 6약 ~ 6강) 상당으로 추정된다. 니가타 방송 사사 "니가타 방송 40년의 발자취"에도 "니가타 시에서 진도 6"의 기술이 있다.

3. 2. 니가타 지역의 진도

당시 일본 기상청의 지진 관측은 기상 관서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공식 기록보다 실제 진동은 더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원지 인근 지역에서는 진도 6 (현재의 진도 6약~6강)에 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2] 실제로 니가타 방송의 사사(社史)인 《니가타 방송 40년의 발자취》에는 "니가타에서 진도 6"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2]

일본 기상청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니가타현 내 진도 4 이상 관측 지역은 다음과 같다.[56]


4. 피해 상황

니가타 지진은 니가타현, 야마가타현, 아키타현 등 일본해 연안을 중심으로 총 9개 현에 걸쳐 큰 피해를 남겼다.[23] 이 지진으로 사망자 26명,[68][23] 부상자 477명(다른 자료에서는 447명[24])[69]이 발생했으며, 주택 피해는 완전 붕괴 1,960채, 반파 6,640채, 침수 15,298채에 달했다.[68][23]

격심한 피해로 인해 해외 언론에서도 "일본 북서부에서 대지진 발생"이라고 보도할 정도였으나,[3] 사망자 수는 피해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 "기적"으로 평가받기도 했다.[23]

니가타현 다음으로 피해가 컸던 곳은 야마가타현의 쇼나이 지방으로, 이는 1894년의 쇼나이 지진(M7.0) 이후 이 지역을 강타한 가장 큰 규모의 지진이었다. 특히 니가타시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발생한 액상화 현상은 지반 침하와 건물 붕괴 등 막대한 재산 피해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3][4]

4. 1. 인명 피해

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26명,[68][23] 부상자는 477명[69](다른 자료에서는 447명[24])으로 집계되었다.

지진 피해는 니가타현, 야마가타현, 아키타현 등 일본해 연안을 중심으로 총 9개 현에 걸쳐 발생했다.[23] 피해 규모가 커서 해외 언론에서도 "일본 북서부에서 대지진 발생"이라고 보도할 정도였으나, 사망자 수는 상대적으로 적어 "기적"으로 평가받기도 했다.[23]

특히 야마가타현의 쇼나이 지방은 니가타현 다음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는 1894년 발생한 쇼나이 지진(M7.0) 이후 쇼나이 지방을 강타한 가장 강력한 지진 중 하나였다.

4. 2. 재산 피해

지진으로 인한 재산 피해는 상당한 규모였다. 주요 주택 피해 현황은 다음과 같다.[68][23]

피해 종류규모
완전 붕괴1,960채
반파6,640채
침수15,298채



이러한 피해는 니가타현, 야마가타현, 아키타현 등 일본해 연안을 중심으로 총 9개 현에 걸쳐 발생했다. 피해 규모가 커 해외 언론에서도 "일본 서북부에서 대지진 발생"이라고 보도할 정도였다.[3]

특히 니가타현 다음으로 피해가 컸던 야마가타현 쇼나이 지방은 1894년 발생한 쇼나이 지진(M7.0)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지진 피해를 겪었다. 이 지역에서만 총 3,534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추가로 11,000채가 피해를 입었다.[3]

피해가 컸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액상화 현상이었다. 특히 니가타시의 저지대는 시나노강아가노강의 삼각주 퇴적물 위에 세워졌는데, 이곳은 주로 굳지 않은 모래로 이루어져 지반이 약했다. 지진 발생 시 강한 흔들림으로 인해 액상화가 발생하면서 즉각적인 토양 다짐 현상과 함께 곳곳에서 모래 화산이 형성되었다.[3][4] 실제로 침강이 발생한 지역과 모래 화산이 나타난 지역은 과거 강의 유로를 표시한 오래된 지도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액상화가 광범위하게 발생한 지역에서는 최대 140cm의 땅 꺼짐(침강)이 측정되기도 했다. 시나노강 변의 매립지에 건설된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대부분의 건물이 기울어졌고, 그중 한 동은 완전히 옆으로 넘어져 전복되었다. 이는 해당 건물에 설치된 강진동 가속도계에 기록된 최대 지반 가속도가 비교적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피해였다.[4]

4. 3. 쓰나미 피해

일본 기상청은 13시 30분에 쓰나미 경보를 발표했으나[70][25], 실제로는 지진 발생 약 15분 만에 이미 쓰나미 제1파가 니가타현 해안에 도달했다. 니가타시에는 높이 4m의 쓰나미가 닥쳤으며[25], 이 외에도 사도섬, 아와시마, 시마네현오키 제도까지 넓은 범위에서 침수 피해가 발생했다.[71][10][25]

주요 지점별 쓰나미 높이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71][10][26]

지역쓰나미 높이
니가타시4m
사도섬 료쓰항3m
시오야칸 (또는 시오타니[10])4m
나오에쓰시1m ~ 2m
이와후네항 부근4m



일부 모래사장에서는 파도가 해안선을 넘어 밀려 올라오면서 최대 6m가 넘는 쓰나미가 관측된 곳도 있었다.[71][10][26] 쓰나미 파고는 제1파가 가장 높았던 곳도 있었지만, 제3파가 더 높았다는 목격담도 존재한다.[71][10][26] 또한, 지진 발생 후 수 시간이 지나서야 최대 파고를 기록한 지역도 있었다. 쓰나미는 약 20분 주기와 50분 주기의 파동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특성을 보였다.[71][26]

쓰나미로 인한 침수 피해는 주로 시나노강 우안의 야마노시타 지구를 포함한 시나노강 유역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특히 구리노키강 주변 등 일부 지역에서는 침수가 한 달 이상 지속되기도 했다.[71][11][26]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1964년 6월 16일 오후 3시에 해일주의보를 발령했으며[72], 다음 날인 17일 0시에 해제했다.[73] 이 지진으로 인해 울산에서 최고 0.39m, 부산에서 최고 0.32m 높이의 쓰나미가 관측되었다.[74]

4. 4. 액상화 현상 및 화재

니가타시시나노강아가노강 하구의 삼각주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반은 주로 굳지 않은 모래 퇴적물로 이루어져 있었다.[3][4] 이러한 지질학적 조건은 지진 발생 시 광범위한 액상화 현상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액상화는 땅이 액체처럼 변하는 현상으로, 이로 인해 지반 침하와 모래 화산 분출 등이 발생하며 건물 등에 큰 피해를 주었다.[3][4] 당시에는 '액상화 현상'이라는 용어 대신 '유사 현상'이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액상화 현상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현립 가와기시마치 아파트


액상화 피해와 더불어 대규모 화재도 발생했다. 니가타 공항과 항구 사이에 위치한 쇼와 석유(현 이데미츠 코산) 니가타 정유소에서는 지진의 충격으로 가솔린 탱크 배관이 파손되었다.[5] 여기서 흘러나온 가솔린이 액상화로 지표면에 올라온 지하수 및 쓰나미로 밀려든 바닷물 위에 퍼졌고, 지진 발생 약 5시간 뒤에 불이 붙으면서 큰 화재로 번졌다.[5] 불은 주변의 다른 탱크들로 옮겨붙어 폭발을 일으켰고, 12일 동안이나 화재가 지속되며 인근 주거 지역까지 큰 피해를 입혔다.[5][27] 이 화재는 일본 역사상 최악의 산업 단지 화재 사고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초기에는 액상화가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지만, 이후의 연구를 통해 지진의 흔들림 중에서도 건물을 천천히 오랫동안 흔드는 장주기 지진동 역시 탱크 파손과 화재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밝혀졌다.[5]

쇼와 석유 정유소의 화재 모습 (1964년 6월 17일)


화재 진압 과정에서는 석유 화재와 같은 특수 화재에 대응할 수 있는 화학 소방차가 니가타시에 배치되어 있지 않아 초기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도쿄 소방청의 지원을 받아 겨우 화재를 진압할 수 있었다.

한편, 액상화 현상은 막대한 피해를 주었지만, 예상치 못한 긍정적인 효과도 일부 있었다. 액상화로 인해 땅에서 솟아오른 물이 불길이 번지는 것을 부분적으로 막아주었고, 물러진 지반이 지진의 충격을 흡수하는 면진 효과를 내어 건물 상부의 흔들림을 다소 줄여주기도 했다.[34][31]

4. 4. 1. 액상화 현상으로 인한 피해

3,534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11,000채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3] 이러한 큰 피해는 기반 토양 조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니가타시 저지대 대부분은 시나노강아가노강의 삼각주 퇴적물 위에 세워졌는데, 이 퇴적물은 주로 굳지 않은 모래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진으로 인한 흔들림은 액상화 현상을 일으켰고, 이는 즉각적인 토양 다짐과 다수의 모래 화산 발생으로 이어졌다.[3][4] 지반이 내려앉은 지역과 모래 화산이 나타난 지역을 표시한 지도는 과거 강이 흘렀던 경로를 보여주는 오래된 지도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액상화가 발생한 넓은 지역에서는 최대 140cm의 지반 침하가 측정되었다. 시나노강에 의해 매립된 땅 위에 지어진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대부분의 건물이 기울어졌고, 그중 한 동은 완전히 쓰러졌다. 이는 해당 건물에 설치된 강진동 가속도계에 기록된 최대 지반 가속도가 비교적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일이다.[4]

지진으로 붕괴된 니가타 쇼와 다리


쇼와 다리의 붕괴는 상세하게 분석되었다.[6][7]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다리 붕괴는 지진 발생 약 70초 후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지반의 직접적인 흔들림이 붕괴의 원인이 아님을 시사한다. 액상화로 인해 땅이 옆으로 밀리는 측방 확산 현상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다리 교각 아래의 말뚝기초가 움직인 것이 붕괴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6][7]

니가타시 주변 지역은 1950년대 이후 도시화와 생활 방식 변화로 지하수에 포함된 수용성 천연가스를 채취하기 위한 지하수 양수량이 급증했다. 이 때문에 심각한 지반 침하가 발생했다. 1959년 이후 니가타현과 각 지자체가 천연가스 및 지하수 채취 규제를 시행하면서 대규모 지반 침하는 잦아들었지만, 그 전까지 니가타시 등에서는 연평균 약 20cm의 지반 침강이 관측되었다. 이러한 지반 침하 역시 니가타시 중심부의 액상화 피해와 쓰나미로 인한 침수 피해를 키운 요인이 되었다.

연속된 아치 구조가 특징인 반다이 다리는 시나노강의 니가타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로 교량 중 유일하게 이 지진을 견뎌냈지만, 지진의 영향은 주변에 남아있다. 다리 양쪽 끝, 시나노강 제방을 따라 나란히 놓인 시도(시나노강 우안 거리, 시나노강 좌안 거리)는 상류에서 하류 방향으로 다리 밑을 직선으로 통과하지만, 다리 아래 인도용 지하 통로(박스 컬버트) 앞뒤 구간은 완만한 갈고리 모양으로 휘어 있으며, 상류와 하류 사이에는 약 1m의 높이 차이가 있다. 반다이 다리 자체는 니가타 지진으로 약 10cm 침하했지만, 지진 발생 전 이미 지반 침하 등으로 약 1.2m 가라앉은 상태였다.

한편, 쇼와 다리는 복구 공사 과정에서 기존 교각 일부를 재사용했는데, 이 중 일부는 기울어진 상태 그대로 사용되었다.

4. 4. 2. 쇼와 석유 화재

니가타 공항과 니가타항 사이에 위치했던 쇼와 석유(현 이데미츠 코산) 니가타 정유소의 석유 탱크에서 발생한 화재는 니가타 지진으로 인한 가장 극적인 피해 중 하나였다. 지진 발생 당시, 강한 흔들림으로 인해 가솔린이 들어있던 탱크의 배관이 손상되었다.[5] 이로 인해 누출된 가솔린은 액상화 현상으로 지표면으로 솟아오른 지하수 및 쓰나미로 밀려든 해수 위로 넓게 퍼져나갔다. 지진 발생 약 5시간 후, 유출된 가솔린에 불이 붙으면서 대규모 화재와 폭발이 시작되었다.[5]

불길은 수면 위에 퍼진 기름을 따라 번지면서 주변의 다른 석유 탱크들까지 차례로 폭발시키는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무려 12일 동안이나 지속되었다.[5] 이 불은 정유소 인근의 주거 지역으로까지 번져, 최종적으로 주택 347동이 전소되고 6동이 반소되는 피해를 입혔으며, 1,407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27] 이 화재는 일본 역사상 최악의 콤비나트 화재 사고로 기록되었다.[5]

화재 발생 초기에는 액상화 현상이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었으나, 이후 지진 연구가 진행되면서 장주기 지진동 역시 탱크 파손과 화재 확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밝혀졌다.[5]

당시 니가타시에는 석유와 같은 유류 화재 진압에 필수적인 화학 소방차가 배치되어 있지 않아 초기 진화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소방청을 통해 도쿄 소방청에 긴급 지원 요청이 이루어졌고, 가마타 소방서를 중심으로 한 지원대가 급파되었다. 도쿄에서 파견된 화학 소방차 5대와 소방대원들은 폭발 위험이 있는 가솔린 첨가물 탱크와 수소 탱크로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20시간에 걸친 사투를 벌였고, 마침내 추가 확산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만약 이들 탱크까지 연소가 확대되었다면 니가타시 전역이 폭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한편, 통신 두절로 인해 민간 기업이 보유한 화학 소방차 동원에 어려움이 생기자, 니가타 방송 라디오를 통해 "○○ 회사의 관계자분께 대책 본부로부터의 출동 요청입니다. 화학 소방차를 니가타시로 파견해 주십시오"라는 이례적인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으며, 이 방송을 들은 관계자들이 소방차를 급파하는 등 민관의 필사적인 노력이 이어졌다.[30]

참고로, 1948년 후쿠이 지진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전에 지반 개량 공법(바이브로 플로테이션 공법)을 적용하여 지반을 다져놓았던 탱크들은 이번 지진에서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34]

4. 5. 지반 균열

니가타시 고바리 지구에서는 지하수를 분출한 지반 균열에 25세 여성이 추락하여 사망했다.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지진 후, 모래 사이에서 팔 하나만 공중에 나와 있어서 파내어 보니, 지반 균열에 떨어진 여성이 기어 올라오려다 팔을 든 채로 모래에 파묻혀 죽은 것을 알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2][33]

또한 야마가타현 사카타시의 시립 제3 중학교에서도 교정에 생긴 지반 균열에 대피 중이던 여학생이 추락하여 압사했다. 해당 학교의 부지는 모가미강 하구 부근의 매립지로, 지진 당시 격렬한 액상화 현상이 일어났다. "사망한 여학생의 마지막 모습을 본 이야기"로서 "살아있는 느낌도 없이, 문득 앞을 보니 여자아이가 지반 균열에 떨어져 어깨 부근까지 땅 속에 들어가 손을 들고 무언가 외치는 듯했지만, 순식간에 지반 균열이 닫히면서 여자아이의 모습은 땅 속에 숨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갈라진 틈에서 물이 뿜어져 나온 것은 그 후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33]

4. 6. 건축물 피해

3,534채의 가옥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추가로 11,000채가 피해를 입었다.[3] 이러한 광범위한 피해는 지진 발생 지역의 열악한 지반 조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니가타 시의 저지대 대부분은 시나노강아가노강이 만든, 아직 단단하게 굳지 않은 모래로 이루어진 삼각주 퇴적물 위에 세워졌다. 지진 발생 시 강한 흔들림은 액상화 현상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땅이 급격히 내려앉는 토양 다짐 현상과 함께 곳곳에서 모래 화산이 형성되었다.[3][4] 실제로 침하가 발생하거나 모래 화산이 나타난 지역은 과거 강이 흘렀던 경로를 보여주는 옛 지도와 거의 일치했다. 액상화가 발생한 넓은 지역에서는 최대 140cm에 달하는 지반 침하가 측정되었다. 시나노강변 매립지에 건설된 한 아파트 단지에서는 대부분의 건물이 기울어졌고, 그중 한 동은 완전히 옆으로 넘어졌다. 이는 해당 건물에 설치된 강진동 가속도계에 비교적 낮은 수준의 최대 지반 가속도가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했다.[4]

니가타시를 가로지르는 시나노강에 놓인 다리들도 큰 피해를 보았다. 목조 다리는 하구에서 오코즈 분수에 이르는 구간까지 거의 대부분 붕괴되었다. 아가노강 하구 근처의 마쓰하마 다리 역시 무너져 내렸다.[37] 마쓰하마 다리에서는 택시 2대와 보행자가 다리 상판과 함께 강으로 추락하여 운전사 등 5명이 부상을 입었다.[33]

영구교(강철 또는 콘크리트 다리) 중에서는 니가타 시내의 4개 다리(반다이 다리, 야치요 다리, 쇼와대교, 에치고선 시나노강 교량)가 피해를 입었다.[37] 철근 콘크리트 아치교인 반다이 다리는 접속부 파손과 약간의 침하만 있었을 뿐, 지진 이후 유일하게 차량 통행이 가능한 상태를 유지했다. 반면 야치요 다리는 교각이 무너지는 등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쇼와대교는 완공된 지 불과 1개월 만에 붕괴되는 비극을 맞았다. 5개의 교각이 무너졌고, 그중 2개는 모래 속에 파묻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으며[38], 다리 상판은 각 경간마다 기울어졌다. 붕괴된 쇼와대교의 모습은 니가타 지진 피해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널리 알려졌다.
시나노강 상공에서 본 모습. 앞에서부터 쇼와대교, 야치요 다리, 반다이 다리 (1964년 6월 17일 13시)
쇼와대교 붕괴는 지진 발생 약 70초 후에 시작되었다는 목격자 증언이 있으며, 이는 직접적인 지반 운동보다는 액상화로 인한 측방 유동(lateral spreading)이 교각 아래 말뚝기초를 움직여 붕괴를 유발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6][7] 쇼와대교(단순 거더교)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던 반다이 다리(다경간 아치교)의 피해 차이는 다리 구조 형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34]

지진 발생 시각이 평일 낮이었기 때문에 학교 시설 피해도 컸다.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의 오야마, 미즈사와, 사이고 지역에서는 가옥 붕괴가 잇따랐다. 특히 교다 유아원(현 호나미 보육원) 건물이 붕괴되어 원아 3명이 압사하고, 원아 14명과 보육사 1명이 매몰되는 참사가 발생했다.[36] 이 사고는 건물의 노후화도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었다. 당시 현지 신문인 쇼나이일보는 6월 18일 자 기사에서 "그야말로 살아있는 지옥도였다"고 참혹한 상황을 보도했다.

반면, 니가타역과 니가타시청 건물은 액상화 가능성을 미리 예측하고 당시 내진 기준을 상회하는 수준으로 설계 및 건축되었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34][35]

니가타 지역은 1950년대 이후 도시화와 생활 양식 변화로 지하수에 포함된 수용성 천연가스 채취를 위한 지하수 양수량이 급증하면서 심각한 지반 침하를 겪고 있었다. 1959년부터 규제가 시행되어 대규모 침하는 멈췄지만, 그 이전까지 니가타시 등에서는 연평균 약 20cm의 지반 침하가 관측되었다. 이러한 지반 침하는 액상화 및 쓰나미로 인한 침수 피해를 더욱 키우는 요인이 되었다.

지진의 영향은 지형 변화로도 나타났다. 아와시마 섬 전체가 약 1m 융기했으며,[54] 일본해 연안 지역은 5cm에서 20cm 가량 침강했다. 가옥이 완전히 파괴되는 전파(全壊) 피해는 니가타시, 무라카미시, 쓰루오카시, 사카타시 등 넓은 지역에서 발생했다.

지진의 흔적은 복구된 구조물에도 남아있다. 반다이 다리는 지진으로 약 10cm 침하했으며, 지진 이전의 지반 침하까지 고려하면 총 1.2m 가량 내려앉았다. 이 때문에 다리 양쪽 끝 제방 도로와 다리 밑을 지나는 도로 사이에는 약 1m의 높이 차이가 생겼고, 도로 선형도 완만한 갈고리 모양으로 변형되었다. 또한, 붕괴되었던 쇼와대교는 복구 공사 과정에서 기존 교각 일부를 재사용했는데, 이때 일부 교각이 기울어진 상태 그대로 사용되었다.

5. 사회적 영향

니가타 지진은 일본 사회 전반에 걸쳐 지진 재해 대비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도시 개발 과정에서 간과되었던 안전 문제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1950년대 니가타시와 주변 지역에서는 도시화와 현대화 과정에서 지하수와 수용성 천연가스를 과도하게 추출하면서 심각한 지반 침하 문제가 발생했다.[1] 1959년부터 추출 제한 조치가 시행되었지만, 지진 발생 전까지도 연평균 20cm 가량의 지반 침하가 지속된 것으로 나타났다.[1] 이러한 누적된 지반 침하는 지진 발생 시 액상화 현상 및 쓰나미와 맞물려 대규모 침수 피해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1][2] 이는 급격한 도시 개발 과정에서 안전 관리가 미흡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된다.

니가타시 중심부를 흐르는 시나노강을 가로지르는 주요 통근 다리 중 하나인 반다이교는 지진의 충격을 견뎌냈지만, 다리 아래 양쪽으로 강과 평행하게 나 있는 도로에서 지진 이후 높이 차이가 약 1m 발생했다.[1] 다리 자체는 지진으로 약 10cm만 침하했지만, 기존의 지반 침하와 합쳐져 총 1.2m가 내려앉는 결과를 낳았다.[1]

이러한 막대한 피해는 재난 대비 시스템의 정비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지진으로 인한 재산 피해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고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기 위한 지진 보험 제도의 도입 논의가 본격화되었으며,[3][4] 니가타시 임해부의 석유 콤비나트에서 발생한 대규모 화재를 계기로 소방법 개정의 필요성도 제기되었다.[5]

5. 1. 지진 보험 제도 도입

니가타 지진으로 인한 큰 피해는 지진 보험 제도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당시 니가타현 제3구를 지역구로 둔 중의원 의원이자 제3차 이케다 내각의 대장대신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지진 보험 도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적극 추진했다. 그는 보험심의회에 자문하고 심의를 거치는 과정을 주도했으며,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66년 6월 지진 보험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 법률 제정은 지진 피해로부터 재산을 보호하고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지진으로 니가타시 임해부의 석유 콤비나트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함에 따라, 1965년에는 소방법 개정도 이루어졌다.

5. 2. 소방법 개정

이 지진으로 니가타시 해안가에 있던 석유 콤비나트에서 대규모 화재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1965년 소방법이 개정되었다.

5. 3. 도시 계획 및 건축 기준 강화

니가타시와 주변 지역은 1950년대 도시화와 현대화를 겪으며 지하수에서 수용성 천연가스를 추출하기 위해 물을 과도하게 퍼 올렸다. 이로 인해 심각한 지반 침하 문제가 발생했다. 1959년부터 니가타시 지역에서 천연가스와 지하수 추출을 제한하면서 대규모 지반 침하는 줄어들었으나, 그 기간에도 지반은 연평균 20cm씩 침하한 것으로 관찰되었다. 이러한 지속적인 지반 침하와 더불어, 지진 발생 시 시내의 액상화 현상, 그리고 쓰나미는 대규모 침수 피해를 유발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니가타시 중심부를 흐르는 시나노강을 가로지르는 주요 통근 다리 중 하나인 반다이교는 지진의 충격을 견뎌냈지만, 피해를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다리 아래 양쪽으로 강과 평행하게 나 있는 도로는 지진 이후 높이 차이가 약 1m 발생했다. 다리 자체는 지진으로 약 10cm만 침하했지만, 기존의 지반 침하와 합쳐져 총 1.2m가 내려앉는 결과를 낳았다.

이 지진을 계기로, 재난 발생 시 피해 복구와 시민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1966년 6월에는 지진 보험에 관한 새로운 법률이 제정되어, 지진 피해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6. 언론 보도

니가타 지진은 풍부한 기록 영상이 남은 최초의 지진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지진 피해를 담은 충격적인 영상은 (당시에는 흑백이었지만) 당시 니가타에 있던 NHK와 니가타 방송(BSN) 두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촬영되었다. 특히 니가타 방송은 JNN의 키국인 TBS를 통해 전국의 뉴스 프로그램 등에서 일본 각지에 피해 상황을 전달했다[39].

그러나 지진 발생 당시 니가타현 내 텔레비전 방송국에 연결된 전신 전화 공사(당시)의 텔레비전 중계 회선이 모든 방향(3방향 4회선)에서 끊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전국으로 지진 상황을 전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NHK와 JNN 계열의 니가타 방송, TBS는 방송 송출을 위해 고심해야 했다. 각 방송사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신속하게 대응하여 재난 상황을 보도하기 위해 노력했다.

6. 1. NHK

니가타 지진은 풍부한 기록 영상이 남은 최초의 지진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지진 피해를 담은 충격적인 영상은 (당시에는 흑백이었지만) 당시 니가타에 존재했던 NHK와 니가타 방송 두 개의 텔레비전 방송국, 나아가 후자는 가맹하고 있는 JNN의 키국인 TBS를 통해 전국의 뉴스 프로그램 등에서도 일본 각지에 전해졌다[39].

그러나 지진 발생 당시 니가타현 내 텔레비전 방송국에 연결된 전신 전화 공사(당시)의 텔레비전 중계 회선이 어느 방향(3방향 4회선)도 끊어져 전국에 그 상황을 전달하는 데 있어, 그 대응에 NHK와 JNN 계열의 니가타 방송과 TBS는 고심했다.

NHK의 대응에 대해서는, "NHK 연감 '65"(1965년 10월 25일, 일본방송출판협회 발행)의 128~9 페이지에 상세하게 게재되어 있으며[40], 그 내용을 바탕으로 기술한다.

지진 발생 후, NHK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라디오는 13시 02분부터 2분간, TV는 3분간이라는 짧은 정파 후에 즉시 재해 방송을 시작했다.[41]

'''라디오 방송'''

  • '''라디오 제1방송 (지역)''': 16일 13시 4분부터 18일 오전 1시까지 36시간 연속 방송을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뉴스, 재해 관련 프로그램 등 전국 중계 방송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역 방송으로 전환하여, 재해 상황, 기상대, 경찰, 소방 관련 공지, 주의 사항, 피난자 유도, 관계 기관의 긴급 연락을 시작으로 재해 대책 본부와 피해 지역을 연결하는 3원 방송, 알림, 실종자 찾기 등 다채로운 방송을 진행했다. 18~20일까지는 하루 15시간 정도의 지역 방송을 편성했으며, 그 후에도 지역 특별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편성했다.[41]
  • '''라디오 (전국)''': 지진 발생 직후인 13시 15분에 로컬 속보를 내보냈으며, 이어서 13시 25분, 37분에 쓰나미 경보 임시 뉴스를 방송했다. 이후 정시 뉴스 등을 포함하여, 적절한 시기에 경보, 지진의 범위, 피해 상황 등을 속보로 전했으며, 15시 27분에는 NHK 니가타 방송국의 방송을 녹음한 첫 번째 방송을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실시했다. 19시 뉴스는 30분으로 시간을 확대하여 방송했으며, 그 후 뉴스도 지진 관련 특집 뉴스를 마련하여 방송 시간을 확대, 17일 오전 1시 21분까지 현지 발 뉴스 등을 포함하여 방송했다. 17일 이른 아침 방송 시작 후에도 정시 뉴스 시간을 임시로 연장하여, 석유 탱크 연소 등을 중심으로 재해 상황을 전했다.


'''텔레비전 방송'''

  • '''종합 텔레비전 (지역)''': 16일 13시 5분에 방송을 재개한 후, 같은 날 14시 30분 이후, TV 카메라를 옥상, 나아가 40m 철탑에 설치하여 피재 현장의 실황 중계를 지역 방송으로 시작했고, 2대의 TV 중계를 활용하여 피해의 참상을 전달했다.[41]
  • '''종합 텔레비전 (전국)''': 16일 13시 18분부터 연속적으로 보도했으며, 13시 25분부터 '쓰나미 경보'를 실시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텔레비전 네트워크 회선이 완전히 끊어진 탓에, 전국에 영상을 중계하기 위해 NHK 니가타 방송국의 야히코 산 송신소에서 보내는 방송파를, NHK 도야마 방송국의 구레하 산 송신소 방송파 중계로 간신히 잡아[43], NHK 가나자와 방송국NHK 나고야 방송국의 마이크로파 회선을 통해 도쿄로 보내는 루트를 독자적으로 개척하여 17시 33분, 피해 영상이 겨우 전국에 생방송으로 송출되었다. 그 후에도 18시가 넘어서도 생방송을 진행했다. 이 독자 회선은 처음에는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점차 개선되어 화질이 선명해졌다. 야간에도 수시로 특집 뉴스를 마련하여, 석유 탱크 폭발 등의 뉴스를 방송했다.


'''특별 프로그램 방송'''

이 재해와 관련하여, 종합 텔레비전과 라디오 제1에서 다음과 같은 특별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날짜시간프로그램 제목채널비고
6월 16일오후 7:40 ~ 8:00니가타 지진종합 텔레비전・라디오 제1
6월 16일오후 9:40 ~ 9:59현지에서 보는 니가타 지진라디오 제1니가타 발 전국 방송
6월 17일오전 6:15 ~ 6:30재해지 니가타에서라디오 제1니가타 발 전국 방송
6월 17일오전 7:15 ~ 7:45하룻밤 지난 재해지라디오 제1도쿄・니가타・쓰루오카・아키타의 릴레이 중계
6월 17일오전 7:20 ~ 8:00하룻밤 지난 니가타 지진종합 텔레비전니가타 시내에서 중계. 당시 니가타 현 지사, 쓰카다 주이치로 등이 출연.
6월 17일오후 0:20 ~ 0:40그 후의 재해지종합 텔레비전・라디오 제1니가타 발 전국 방송
6월 17일오후 7:33 ~ 8:00재해지는 호소한다종합 텔레비전・라디오 제1도쿄・니가타 2원 방송. 아카자와 마사미치 자치 대신 (당시), 쓰카다 니가타 현 지사 (당시)가 출연.
6월 17일오후 10:30 ~ 11:00니가타 지진의 교훈종합 텔레비전
6월 18일오전 0:00 ~ 0:30 (17일 심야 24:00 ~ 24:30)기자 좌담회 - 니가타 지진을 보고종합 텔레비전・라디오 제1
6월 21일오후 1:15 ~ 1:59니가타 지진이 가르쳐주는 것라디오 제1
6월 21일오후 1:00 ~ 2:00보도 특집 『니가타 지진』종합 텔레비전
6월 23일오전 7:20 ~ 7:41니가타 지진 발생 1주일종합 텔레비전도쿄・니가타・쓰루오카 3원 릴레이 중계



'''정규 프로그램에서의 편성 및 지원'''

정규 프로그램에서도, 라디오 제1의 『시간의 흐름』, 종합 텔레비전의 『시간의 표정』, 『오늘 아침의 화제』, 『현대의 영상』 등으로 관련 내용을 편성했다.

이 재해 보도에 따라, 도쿄의 방송 센터NHK 나가노 방송국 등에서도 니가타로 지원을 위해 달려갔다.[41]

6. 2. 니가타 방송 (BSN)

니가타 방송(BSN)은 지진 발생 당시 풍부한 기록 영상을 남긴 방송사 중 하나이다. 지진 피해를 담은 충격적인 영상은 (당시 흑백) BSN과 JNN 키국인 도쿄 방송(TBS)를 통해 전국 뉴스 프로그램 등에서 방송되었다[39]. 그러나 지진 발생 직후 니가타현 내 전신전화공사(당시)의 텔레비전 중계 회선이 모든 방향에서 끊어져 전국 방송에 어려움을 겪었다. BSN의 상세한 대응은 1967년 발행된 사사(社史) "니가타 방송 15년의 발자취"에 기록되어 있다[48].

지진 발생 후 BSN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 6월 16일
  • 13시 01분: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중 지진 발생 (니가타시 진도 6). 가와기시초 본사 정전 및 본사-송신소 간 방송선 단선으로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 중단. 인접한 호쿠리쿠 가스의 가스 탱크 누출로 폭발 위험이 제기되어 전 사원에게 피난 명령이 내려졌으나 곧 해제되었다[49].
  • 14시 15분: 텔레비전 방송 재개. 스튜디오 카메라를 옥상에 설치하여 불타는 쇼와 석유 정유소의 검은 연기와 붕괴된 쇼와대교 등을 방송했다[50].
  • 14시 33분: 옥상 카메라로 '''시나노강을 역류하는 높이 180cm의 쓰나미를 포착하여 방송'''하고, 2인치 VTR에 녹화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쓰나미 영상 생중계 및 녹화로 기록된다[50].
  • 15시 05분: 라디오 방송 재개. 야마니츠 송신소에서 방송을 시작했으며, 취재 중 지진을 만난 기자가 도보로 송신소로 이동하여 쇼와대교 붕괴, 쇼와 석유 화재, 쓰나미, 국철 불통 등의 정보를 전달했다. 이후 텔레비전은 라디오 음성을 함께 송출했다.
  • 15시 25분: 본사에서 현 경찰 본부, 경찰청, 도쿄 지사를 경유하여 TBS 라디오에 지원을 요청했다.
  • 16시 01분: 현청에 설치된 현 재해 대책 본부의 재해 정보, 실종자 명단 등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본사 스튜디오 사용이 불가능하여 현청에 주차된 라디오카에서 송신한 FM파를 야마니츠 송신소에서 직접 수신하여 방송했다.
  • 17시 15분: 위문 문구로 변경된 라디오 CM 방송 재개.
  • 20시 00분: 라이프라인 정보, 공적 정보, 재해 상황, 실종자 정보, 니가타 방문 수학여행객 안부 정보 등을 밤새 방송했다.
  • 20시 14분: 가와기시초 본사와 전전공사 니가타 전화국 간 중계 회선 임시 복구.
  • 20시 56분: TBS와의 임시 상행 회선 확보 완료 후, JNN의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처음으로 니가타 지진 피해 영상이 방송되었다[51].
  • 심야: 텔레비전 방송 휴지.
  • 6월 17일
  • 10시 10분: 전날의 지원 요청에 따라 도쿄 방송(TBS)와 아키타 방송에서 총 57명의 스태프와 텔레비전 중계차, 전원차 등 방송 복구 장비가 니가타에 도착했다. TBS 중계차는 즉시 재해 현장으로 이동하여 로컬 특별 프로그램 내에서 생중계를 실시했다[51].
  • 12시 00분: 'JNN 뉴스'를 통해 다시 피해 상황을 전국에 알렸다[51].
  • 12시 45분: 전국 네트워크 프로그램 '폴라 부인 뉴스' (당시 아사히 방송 텔레비전 제작)에서 피해 지역 상황을 전국에 생중계했다[51].
  • 18시 00분: 가와기시초 본사 스튜디오에서 라디오 방송 재개. TBS가 가져온 FM 장비로 본사-야마니츠 송신소 간 회선을 임시 복구하고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 22시 30분: 약 5,000명의 실종자 정보를 포함한 재해 방송 종료.


또한, BSN은 재해 특별 프로그램 방송 중 니가타시 재해 대책 본부의 요청으로, 현 내 화학 공장 관계자들에게 쇼와 석유 화재 현장으로 화학 소방차 파견을 요청하는 방송을 실시했다. 라디오를 들은 관계자들에 의해 당일 심야 화학 소방차가 현장에 도착했다.

니가타 공항에서 항공 촬영을 준비하던 BSN 카메라맨은 활주로에서 발생한 액상화 현상을 8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다. 이 필름은 사용 불능 직전의 니가타 공항에서 하네다 공항으로 이동하여 대기 중이던 TBS 텔레비전(TBS) 스태프에게 전달되었고, 전국에 방송되었다.

BSN과 TBS가 촬영한 비디오 및 필름 영상은 이후 지진 연구 자료 등으로 활용되어 지진 대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50].

2024년 6월 16일, 니가타 지진 발생 60주년을 맞아 BSN은 로컬 와이드 뉴스 'BSN NEWS 유우나비'의 특별 프로그램 "BSN NEWS 유우나비 스페셜 니가타 지진 60년 '그날의 기억 내일을 위한 대비'"를 생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세계 최초로 생중계된 쓰나미 영상을 포함한 당시의 다양한 기록 영상과 피해자의 증언을 통해 니가타 지진을 되돌아보고, 노토반도 지진으로 니가타시에서 다시 발생한 액상화 현상 등을 언급하며 재해에 강한 지역 사회 구축과 니가타현 내 기업의 방재 대책 등을 소개하며 지진 피해에 대한 "미래를 위한 대비"를 강조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BSN 공식 유튜브 채널에 공개되어 당시 영상 자료들이 인터넷에서 공식적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19].

6. 3. 기타 언론

니가타 지진은 풍부한 기록 영상이 남은 최초의 지진으로도 알려져 있다. 지진 피해를 담은 충격적인 영상은 (당시에는 흑백이었지만) 당시 니가타에 있던 NHK와 니가타 방송 두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촬영되었다. 특히 니가타 방송은 JNN의 키국인 TBS를 통해 전국의 뉴스 프로그램 등에서 일본 각지에 피해 상황을 전달했다[39].

그러나 지진 발생 당시 니가타현 내 텔레비전 방송국에 연결된 전신 전화 공사(당시)의 텔레비전 중계 회선이 모든 방향(3방향 4회선)에서 끊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전국으로 지진 상황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NHK와 JNN 계열의 니가타 방송, TBS는 방송 송출을 위해 고심해야 했다.

7. 니가타 지진의 교훈과 대한민국에 대한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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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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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문서 水では消火できない油脂火災に対応する[[化学消防車]]が配備されていなかった。詳細は「[[#火災と液状化]]」参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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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문서 側方流動 液状化に伴う地盤の流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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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문서 尚、この地震に於いてテレビ局が撮影・保存し残された動画は全部モノクロであり、当時はキー局のNHK(放送センター)やTBSもカラー・フィルムでの報道取材は行っておらず(NHKは1966年10月26日、TBSは1968年9月30日各々同取材を開始)、更に、新潟のローカル・テレビ局の報道取材がカラー化されたのは、NHK・BSN共に1970年のことである。余談だが、1964年の地震当時、NHK新潟放送局は総合・教育共に既にカラー放送を開始、BSNはその後の同年10月1日に、東京オリンピックの開催を前に同放送を開始している。何れも同放送開始当初は共に、東京・大阪等からの電電公社の放送用のマイクロ波回線から受けた全国番組のみカラー放送が可能であった(以上、[[NHK新潟放送局#沿革]]、[[新潟放送#沿革]]、[[日本放送協会の沿革#特殊法人化後の昭和時代]]、[[TBSテレビ#沿革]]を参照)。
[40] 서적 NHK年鑑'65 "{{NDLDC|2474362}}" NHK出版 1965-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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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서적 新潟放送十五年のあゆみ 新潟放送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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